考え/점과 선

[스크랩] 에로스의 현상학

trytobe 2009. 6. 17. 22:19

내가 여성성 안에서 타인과의 관계에 의해 나의 동일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기원으로서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자기와 다르게 될 수 있는 것은 정확히 , 그 자체로서이다. (전체와 무한, 305-306)




나의 사랑을 말함이 없이 어떻게 타인들을 사랑한다고, 타인을 사랑하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내 집에서, 나의 사랑을 얘기 함이 없이 너른 사랑을 말할 수 있는가? 나의 에로스를 말함이 없이 어떻게 이타적인 사랑을 말할 수 있는가? 공자도 이미 오래 전에 <수신 제가 치국 평천화>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나를 다스림이 없이 어떻게 나 아닌 다른 이에게 나아갈 수 있는가? 


에로스, 사랑을 통한 타자와의 관계는, 많은 이들이 말하듯이 - 특히 프로이트, 그리고 라캉이 말하는 나르시즈적인 사랑 - 필연적인 실패로, 결국 나의 <죽음>으로 특징지워져야 하는가? 만일 이 말의 일상적인 사용에서 보여주듯이 에로틱한 것을 소유, 파악, 앎으로 특징지운다면, 여기서 실패 이외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타자를 소유하고, 파악하고, 알 수 있다면, 여기에는 더 이상 타자는 없을 것이다. 소유, 파악, 앎은 주체의 가능성/힘의 실현과 동의어이다. 이 실패는 타자와의 관계를 일반적으로 융합의 관계로, 둘이 하나가 되는 관계로 보는 데에서 유래한다. 우리가 잘 알 듯이, 그 사랑의 이상, 사랑을 이끄는 이념은 너무 자주, 이 <하나 됨>의 이념에 의해서 이끌린다. 결혼은 둘이 하나 되는 성스러운 의식이며, 둘이 <우리>의 환상에 의해서 이끌리고 얽히는 사건으로 그려진다. 


에로스가 소유와 다르게, 주체의 자기의 가능성의 실현/힘과 다르게 기술되어질 수는 없는가? 사랑을, 에로스를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을 나르시즘적인 사랑으로 말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면, 그로부터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다시 세울 수 있는 가능성의 첫발이 내 딪어질 것이다. 레비나스가 제시하는 <에로스, 성적인 쾌락의 현상학>은 모든 에로틱한 융합의 부재 아래에서, 여성적인 것의 예외적인 역할과 자리에서 사랑이 에로스가 실패가 아닌 나의 죽음이 아닌, 사랑의 새로운 열림을 보여준다.



레비나스가 기술하는 <애무 caresse>는 에로틱한 사랑의 기술은, 사랑은 소유가 아닌, 발산이 아닌, <타자성>과의 <신비>와의, 다시 말해 <미래>와의 관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은 <모든 것이 거기에 있는데 거기에 없는, 있을 수 없는 것>과의 관계이다. 


< 모든 가능성은 불가능한 거기에서, 우리가 더 이상 어떤 가능성도 가지지 않는 거기에서, 주체는 여전히 에로스에 의한 주체이다. 사랑은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유가 없다. 그것은 우리를 덥치고, 우리를 상처낸다. 그런데 그 안에서 는 여전히 살아 남는다.>(TA, 81-82)


여기서 <나>의 강조는 나의 것이 아닌 레비나스의 것이다. 그는 이 <je> 를 이태릭체로 강조한다. 나는 여기서 <살아 남은 survécu> 나에서 <살아 남은>에 주목한다. 전쟁에서 살아 남은, 사고에서 살아 남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은, 죽음의 순간에서 살아 남은, 이 삶은 얼마나 소중한가! 그 살아 남은 자의 마음은 그 전과 같을까? 잠시 생각한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이 사랑에서 살아 남은 <나>는 사랑과 죽음을 동일시하는 그 단순성을 넘어간다. 삶과 죽음의 구분, 있음과 없음의 구분, 죽느냐 사느냐의 구분, 그 단순한 구분보다 더한 가치는 죽음과 같은 것을 거쳐서 <살아 남은 것은 가치>이다. 너무도 쉽게 삶을 죽음에 의해 설명하는 몽매함, 그 단순함, 이제는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삶이, 태어남이 이미 죽음을 예고한다는 사실은 우리는 경험적으로 다 안다. 이 단순 명백한 사실에서 출발해서 아직 오지 않는 것에서 출발해서, 나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에너지로 사용해서 나의 가능성을 펼치는 이 코나투스의 즐거움을 이제 접자.  프로이트와 라캉은 (미친)사랑은  - 우리가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을 쓸 때 떠올릴 수 있는 그러한 사랑 - 자살의 한 형태, 죽음의 한 형태라고 말한다. 사랑은 죽음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레비나스가 기술하는 주체, 나는 누구인가? 레비나스가 여성적인 것을 절대적인 타자성을 놓았을 때, 이 타자성에서 깨어나는 철학적인 주체는 남성적인 주체일 것이다. 그것은 서양의 철학사의 철학적인 주체가 항상 남성적인 주체였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에서 상처 받은 주체, 그 상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남은 그 주체, 그 나는 어떤 주체인가? 이 살아 남은 <나>는 무장 해제된 나, 존재의 할 수 있음의 힘을 내려 놓은 나, 여성적인 것의 타자성 안에서, 다시 태어난 주체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여기서 부터 주체는 이제 나 밖에 다른 타자들에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열린다. 이 여성의 내밀성, 내재성으로부터 절대적인 타자성으로, 내 밖의 타인들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 반대가 아니다. 레비나스를 읽지 않는 자들은 레비나스에 대해 말하는 헛소리는 주로 그의 타자가 하늘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타자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디우와 지젝의 헛소리를 들어보라.


존재의 가능성, 주체의 힘, 지배를 넘어서 가는 에로틱한 관계에 대해 기술해 보자.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에로틱한 사랑의 현상학으로 애무에 대한 기술 description이다. 이 애무는 철학사에서 한번도 이념으로 생각되고 말해지지 않은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이 애무의 지향성은 의식의 지향성과는 다른 종류의 지향성을 말한다. <시간과 타자>에서 그리고 <전체와 무한>에서 레비나스는 이 주제를 다룬다.


< 애무는 주체가 존재하는 한 방식이다. 여기서 타자와의 접촉 안에서 주체는 이 접촉을 넘어서 나아간다. 감각으로서의 접촉은 빛의 세계의 부분이다. 그런데 보다 엄격히 말하면, 애무의 대상은 아직 만져지지 않았다. 애무가 탐색하는 것은 접촉에서 주어져 있는 이 손의 끈적임, 이 손의 부드러움이 아니다. 애무의 탐색은 애무가 그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에 의해서 그 애무의 본질을 구성한다. 여기서 "모른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 본질을 형성한다. 애무는 마치 끝없이 달아 나는 어떤 것과의 놀이, 어떤 기획도 계획도 없는 놀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는, 항상 타자인, 항상 다른 것이 어떤 것과의 놀이, 접근 불가능한, 항상 오는 것과의 놀이를 닮았다. 애무는 내용 없는 이 순수한 미래의 기다림이다. 그것은 이 점점 커가는 허기, 항상 더 불어나는 약속, 파악할 수 없는 것 위에 덧 붙여지고 열리는 전망들에 의해 이뤄진다. 그것은 끝없는 허기로 키워진다. 이 성적인 쾌락의 지향성, 미래적 사실(내용)의 기다림이 아닌 미래에 대한 유일한 지향성, 이것은 철학적인 분석에서 한번도 말해지지도, 알려지지도 않은 것이다.>(TA, 82-83)


성적 쾌락에 대해 말한 프로이트 그 자신도 성적 쾌락의 분석에서 이 리비도(성적 에너지, eros)를 쾌락의 <내용> 이상으로 이끌지 않았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이어서 그는 <프로이트가 존재 일반의 경제 안에서 이 성적인 쾌락의 의미를 탐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우리의 주제는 성적인 쾌락을 미래의 사건 그 자체, 모든 내용의 미래, 이 미래의 신비 그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며, 이 미래의 예외적인 자리를 설명하는 것이다.>(TA, 83)


이 미래는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레비나스에게 <여성>, <여성적인 것> 안에서 드러난다. 


의식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 이 지향성은 열어 보임, 비은패의 지향성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탐색> 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걸어가는 탐색, 더듬음 안에 존재한다. 미래의 탐색, 더듬음으로서의 애무의 현상학은 레비나스가 기술 할, 다가오는 주체성의 한 양태이다. 다시 말해, 끝없이 변화하면서, 끝없이 다시 말하면서, 끝없이 다시 태어나는 주체의 양태를 구성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구조로서의 에로스는 자기 현전으로서의 구성하는 의식의 내려놓음과 다르지 않다.  의식이 자신을 세우는, institute 것이라면, 에로스는 이 의식의 세움을 내려놓는 destitue 것이다. 


레비나스에서 주체는 여러 모습으로 기술된다 :<소유의 주체>, <에로틱한 주체>, <윤리적 주체> 등등. 이에 대한 대강의 윤각은 이미 <시간과 타자>에서 그려진다. 이러한 다양한 주체의 모습은 다름 아닌 주체의 탄생과 재단생이라는 끝없는 주체의 깨어남과 다시 태어남과 다르지 않다. <전체와 무한>은 바로 이 주체의 탄생과 새로운 주체의 탄생에 대한 현상학적인 기술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집에서의 <소유의 주체>와 여성의 관계, 그리고 <에로틱한 주체>와 여성의 관계를 거쳐서, 그리고 그것들을 거치고 나서야만 <윤리적 주체>로 나아갈 수 있다. 그 반대가 아니다.  


에로틱한 관계에서 드러나는 여성적인 것은, <전체와 무한>에서, 소유의 주체에서 드러나는 여성적인 것의 이중성과 마찬가지로  애매성 안에서 드러난다.


< 전체와 무한>의 일인칭 기술자, <나>, <레비나스>, <남성적인 주체>는 에로틱한 사랑 안에서, 그가 사랑하는 자 l'Aimée(우연적인 일치이겠지만 라캉의 환자였던 에메Aimée를 떠올리게 한다), 여자 안에서, 여성적인 것을 부드러움 le tendre의 지배 하에서 우선 발견한다. 이 부드러움의 존재 방식은 극단적인 허약함 안에서, 상처받을 수 있음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 부드러움은 단지 부드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그 부드러움 아래 감추고 있는 지하의 세계, 어두운 세계를 동시에 노출시킨다. 레비나스가 여기서 말하는 허약함 faiblesse은 <어떤 속성의 저급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나의 규정에 상관적인 결핍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타자성 그 자체를 특징지운다>(TI, 286).  


<이 극단적인 허약함은 질료의 과잉으로 날고기 같은, 의미가 없는 최상의 질료성으로, 수사도, 돌려 말할 줄도 모르는 실존의 그 한계에 놓여 있다. (...) 그것은 과장된 현전으로 노출증 환자의 벌거벗음을 지시한다. 이것은 이미 모든 성스러운 비밀의 금기에 대한 신성모독을 지시한다. 본질적으로 감춰진 것은 어떤 의미가 됨이 없이 빛으로 자신을 내 던진다.> (TI, 286)


여기서 레비나스가 기술하는 여성적인 것은 <최상급들, superlatifs>로 기술된다. 이 최상급은 그에게 단순한 비유, 은유 이상의 것이다. 이 최상급의 질료성의 과잉, 그것의 최상의 밀도를, 에너지의 과잉을 지시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최상의 질료성 ultramatérialité은 풍경이 단순히 바위와 모래로 부숴진 질료로 단순히 인간적인 것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여성적인 것의 질료성, 특히 여기서 말하는 에로틱한 여성성에서 드러나는 질료의 과잉은 형상의, 형식의 부재를 의미한다.  


< 의미가 됨이 없이 자신을 던지는 것>은 '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것>,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오지 않음은 비실재가 실재의 문턱에서 파알 되는 것도 아니다. <아직 존재하지 않음>은 이것이나 저것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은밀성 clandestinité은 여성적인 것의 삶의 한 방식으로 낮의 삶과 같지 않은 밤의 삶을, 낮의 삶이 이미 박탈된 여성적인 삶의 방식이다. 이것은 단지 고독하고 은밀한 내적인 삶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하로 물러난 것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한 몸짓이다. 


극단적인 순결함, 만질 수 없는 여성성, 영원한 여성성, 그 허약함은 동시에 에로틱한 나체에서 극단적인 노출과 신성모독과 함께한다. 다시 말해 사랑 받는 여자 l'Aimée는 동시에 이 둘이다. <의미가 됨이 없이 자신을 던지는> 방식은 정확히 형식논리를 거부하는 한 방식이다. 여기에는 어떤 종합도 불가능하다. 에로틱한 나체가 산출되는 방식은 불순과 신성모독의 본래적인 현상들이다.  


<부드러움의 지하의 영역에서 이 심연에서 보여지는 극단적인 허약함과 비-의미의 무개의 동시성, 무형식적인 실재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이 무게> 이것을 레비나스는 여성성, 여성적인 것 féminité이라 부른다.


이 여성적인 것 안에서 남성적인 주체는 <여성적이 된다>. 여기에 레비나스의 사랑, 에로스적인 사랑의 경험이 놓인다.


육체의 부드러움 안에서 육체는 이미 존재자의 지위를 떠난다. <육체가 더 이상 존재자의 지위를 가지지 않은 부드러움을 지향하는 애무는 인간이 없는 나라 no man's land 로 향하는 방식을 지시한다.> (TI, 290) 이 인간이 없는 나라는 존재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 존재함을 의미한다. 이 사이, entre-temps, 시간-사이 혹은 사이의 시간은 세계 밖에, 모든 인간의 소유를 거부하는 그런 나라를 말한다. <전체와 무한>에서 주체는 자신을 읽어버리고 자신의 지배와 힘을 읽어버린다. 거기에 죽지 않고 살아 남은 나, 주체가 있다. 레비나스는 이 <나>의 주체성을 <전체와 무한>에서 주체의 죽음 후에 여전히 살려야 할, 구해야 할 주체라고, 그 주체를 방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전체와 무한>의 주제를 형성한다.        


출처 : 비평고원(Critical Plateaux)
글쓴이 : auror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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